「정체 불명의 이십사기 보존회」(2004)

제가 무술계에 별 관심없는 사이 이런 사건이 있었네요,

문체가 거의 ‘그들은 어떻게 미제의 첩자가 되었는가?’ 이런 느낌이군요. 글쓴이는 ‘24반 무예 경당 협회’로 되어있지만, 실제로 협회에서 쓴 글이라고 보기 어려울거 같고요.

이 문건(?)에 대해선 경당협회 측이 사과하기로 하고, 24기 보존회도 자신들의 과오를 나름대로 반성하는 사과문을 올리기로 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실제 양측의 사과문은 없었던거 같습니다.

요즈음 정가의 화두는 상생의 정치를 한다고 하는것이다.
그런데 그의미를 곰곰이 짚어 볼때 짚이는 바가 있기도 하고 애매 모호한 바도 있는것같다.
상생의 의미는 통속적으로 그저 서로를 살리자 는 뜻으로 이해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정치가 지난 시기 특히 국민의정부 이래 서로 발목잡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일관 했던 시기를 감안해 볼때 이제는 그러한 상호 파괴적인 정쟁을 지양 하자는 뜻으로 이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상생의 의미가 함축하고 있는 모두를 표현한다고 할 수는 없다. 상생의 의미는 보다 포괄적으로 음양 오행 이라는 동양 사상의 표현 이기도 한 것이다.
즉 금(金) 은 물(水)을 낳고 (金生水) 물(水)은 나무(木)를 낳고 (水生木) 나무(木)는 불(火)를 낳고 (木生火) 불(火)는 흙(土)을 낳고 (火生土) 흙(土)은 금(金)을 낳는다 (土生金)는 것이고 이와 같은 순환논리의 기저에는 음양(陰陽)의 작용이 관통한다는 것이다.
동양사상은 어떠한 행위나 현상이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삼라만상과 인과관계의 연기 (緣機)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을 음양 오행론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관계에 국한해서 인연(人緣)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인연에는 좋은 인연도 있고 악연(惡緣)이 있어서 사실상 인관 간계의 바다에 병존해 왔고 앞으로도 병존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우리가 좋은 인연을 통해서 사회와 역사에 바람직한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좋지못한 인연을 맺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과 사람이 개인적으로건 집단이건 어떤 인연을 맺느냐 하는 것은 전혀 그자신이나 집단의 자유의사에 달렸다 할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그 선택은 바로 그자신이나 집단의 인격적 수준을 표현하는 것으로 된다.1. 수벽치기의 전수자 육 태 안 선생님과 임 동 규 선생과의 인연은 논쟁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육 태안 선생은 무예도보통지는 중국의 기효신서, 무비지를 배낀 것으로 무예도보통지 소재의 24반무예가 본국검을 비롯 조선세법(예도)을 제외 하고는 민족전통무예라 할수없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서 임 동 규 선생은 무예도보통지가 기효신서나 무비지를 모전으로 하였지만 우리 현실과 체질에 맞게 새롭게 창조함으로서 그이론적, 기술적 순준을 현저히 높였다는 요지의 반론을 제기함으로서 결코 양보할수 없는 날카로운 대립으로 일관해온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의 운명적 만남은 2003년 12월 22일 인사동의 시천주라는 전통음식점이었다. 그때 임 동 규 선생께서는 고구려와 발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기인 모임에서 「한반도 시대의 도래」라는 내용의 발제 연설을 하셨고 이윽고 육 태안 선생의 큰절을 받으시고 우리나라 전통무예계의 큰 스승님의 역할을 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 받으신 것이다.
육태안 선생의 이와같은 제의는 아직까지 상업주의에 오염되지않고 진정하게 민족무예인의 길을 가고 있는곳은 경당과 수벽치기가 있을뿐이라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서 2004년 2월 24일 민족도장경당의 제2창립을 선포하심으로서 육 태안 선생과의 역사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민족도장 경당은 세계속의 무예 성지로 발돋음을 하기에 이른것이다.2. 이에 비하여 현재 화성 행궁의 수위의식을 주관하고 있는 김영호 라는 분은 대구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임 동 규 선생께서 광주 월산동에 「민족도장 경당」을 창립하시어 무예도보통지 소재 24반 무예를 보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무원 생활을 중단 하고 약혼녀와 함께 민족도장 경당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대구에 되돌아가 대구경당을 창설하여 대구 지역에서 24반무예 보급운동에 종사하였다.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경영능력은 크게 발휘하지 못하고 대구 경당은 사실상 문을 닫게 되고 전전하다가 가야산에 폐교를 빌려 가야산무예 학교를 설치 하였으나 이 역시 경영이 어려워져서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이때 마다 임 동 규 선생은 손수 깎으신 목검 (가격으로는 3,000,000원 상당)대금의 탕감을 통해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비록 임의 단체 이기는 하지만 민족도장 경당의 운영위원장, 사범단 대표를 역임할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서 명예회복을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호는 이런 기회를 악용하여 첫째는 연례 행사로 치러지는 제천행사의 축소 압살, 임 동 규 선생과 민족도장 경당본당에 대한 끊임없는 모략, 중상, 폄하, 반 본당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반 본당 세력의 형성에 전념해 왔던 것이다.
그는 한때 김봉곤이라는 탈랜트와 함께 청학동에서 한문서당을 경영하기도 하였는데 이또한 중단하고 2001년부터 수원경당을 맞고 경기문화재단과 수원시가 주최하는 정조시대 전통무예전의 실무를 맡게 함으로서 오늘에 이르게 한것이다. 이 역시 임 동 규 선생의 배려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과정에서 김영호는 방북단사건으로 임 동 규 선생께서 구속 수감된 기회를 악용하여 민족도장경당의 사범단 모임의 대표직임을 강경룡 대표로부터 강요하다 시피 하여 승계받고 이어서 「조선의 무사 백동수」의 출판과 함께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24반무예 복원자임을 사칭하기 시작하였고 24반 무예 경당 협회의 법인화와 함께 노인수 총재의 취임을 사실상 봉쇄함으로서 드디어 김성하 김영호체제를 구축하려 안간힘을 다한것이다.

이와 같은 김영호의 본질과 속성을 너무 잘알고 계시는 임 동 규 선생께서는 그럼에도 불구 하고 최소한 민족도장 경당인의 분열 만은 막아야 하겠다는 일념에서 오히려 김영호 체제의 구축에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영호는 철저하게 비밀주의 분파주의로 일관하였고 드디어는 화성행궁의 수위의식을 전담하게 되면서부터 이십사기 (二十詐欺?)보존회라는 정체불명의 명칭까지 혼칭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김재성, 김석민등은 민족도장 광주본당에서 수석사범을 역임하였고 김광식은 한총련의 열성분자로서 정치적으로도 임 동 규 선생을 추종하였고 최형국 사범역시 임 동 규 선생의 구속수감에 항의하여 탄원서를 낼정도의 임 동 규 선생 숭배자 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무엇이 그들을 하여금 배반과 반역의 무리를 형성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그들이 한결같이 경제적으로 핍박받고 살아왔다는 뼈아픈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눈앞의 개런티에 현혹되었기 때문인것이다.
생각해보라! 임 동 규 선생께서는 자칫하면 그들의 밥그릇을 깰수도 있다는 눈물겹도록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침묵으로 일관 하셨고 관련 공무원들에게 어떠한 심리적 부담도 줄수 없다는 생각에서 지금도 자중자애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사회적 정의란 것이 있고 선악의 구분이 있다.
한편은 숙명적인 논적(論敵)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곤경을 건저주는 통큰 무예인으로서의 금도를 보여 줌으로서 듣는이로 하여금 큰 감동을 주고 있으며 한편은 오히려 이를 기화로 존재자체를 부정해버리는 배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례를 이룬 것이다.
임 동 규 선생 부재시 이를 대행한 큰 업적을 세우고 스스로 배신자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제 반역의 칼을 높이 들고 경복궁의 수문장교대식까지 점거해나가려 하고 있다.
이해할수 없는 것은 수원시, 경기문화재단, 서울시가 이처럼 정체불명의 집단을 비호하고 육성해 주느냐 하는것이다.

임동규 선생은 지금까지 변혁운동 통일 운동에 생명의 위험까지 무릎쓰면서 전념 해오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예도보통지 소재의 24반무예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지극히 큰것이었기 때문에 1998년에는 무형문화재의 지정신청을 종용받기도 하셨고 국방부의 전통의장대를 3년간 직접 지도하시기도 하였으며, 미국의 무예인과도 꾸준한 교류, 노르웨이 경당 연맹의 결성등을 통하여 명실상부한 세계화에 전념하고 계신것이다.
이과정에서 임 동 규 선생이 겪으신 정신적 고통은 당국이 후원은커녕 방해 하지만 말아주었으면 하는 것 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열린의식의 시대가 도래 한다면 이 또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로 될 것이다.
임 동 규 선생은 지금까지 이사회와 역사를 위하여 끊임 없는 노력을 해왔음에도 그에 상응하는 평가나 예우를 받아오지 못하였다.
아니 공안 당국의 편견과 질시속에 온갖 고초를 당하여 오셨고 지금도 특정세력으로부터 그러한 따돌림을 당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낡은 시대의 편견과 오해도 이제 차츰 풀려 나갈수 밖에 없다. 지난 4.15 총선에서 경당인의 국회의원 당선이 이루어졌고 그 외에도 경당을 이해하는 많은 정치인이 배출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확신한다.
1990년대에 한시기 학생운동권, 재야통일운동권에 신선한 충격을 주웠던 빗자루 도사의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 24반 무예 경당 협회 (글쓴이 미상, 공식적인 글이 아닌 듯.), 「정체 불명의 이십사기 (二十詐欺?) 보존회」(200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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